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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웅들의 영웅, ‘즐기는 자’ 조수혁의 100점짜리 축구인생

드루와 0

'즐기는 자', 조수혁.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누구나 어린 시절엔 성공한 인물이 되길 꿈꾼다. 대통령이든 과학자든, 아니면 100만 유튜버든. 직업을 통해 인정받고, 심지어는 인류사에 족적을 남기자는 꿈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가꾸고, 키워나가는 것이다. 사회라는 현실에 발을 디디기 전까진.

현실에서는 모두가 영웅(英雄)이 될 순 없다. ‘개천 용’이 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 현대사회에선 더더욱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형성된 사회경제적 조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각종 구조적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은 가슴 속 이상과 처한 현실이 불일치함을 인지하고서 우울감을 느낀다. 최근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감기 같이 평범한 질환이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맡은 바 임무를 경중에 상관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과 그 삶이 사회적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박수 받기 시작했다. 일(work)의 성취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일 외적인 삶(life)까지 풍요롭게 균형 잡을 수 있는 인간 삶도 그 자체로 의미 있게 인정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영웅의 성취보다 수많은 비영웅(非英雄)들의 성실하고 행복한 삶이 건강한 사회의 척도다.



ACL에서 연일 선방쇼를 펼친 조수혁 골키퍼(노란색)의 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치열한 경쟁이 매일같이 펼쳐지는 프로축구 무대는 이런 사회의 모습을 고밀도로 압축시킨 형태다. 공 좀 찬다는 선수들 중에서도 공을 최고로 잘 차는, ‘노력하는 천재’들이 모인 프로 무대에서, 누구나 리오넬 메시나 손흥민이 될 순 없다. 11명으로 구성된 선발 명단 바깥엔 빛을 받지 못하는 후보 선수들이, 후보의 후보 선수들이 수없이 많다. 경기에 간헐적으로만 출전하는 후보 선수들은 곧잘 위축되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지 못한다. 후보의 후보 선수들은 아예 낙담하고 축구선수 커리어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울산 현대 후보 골키퍼 조수혁(33)이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는 감동적이었다. 조수혁은 주전 조현우가 빠진 이 대회에서 9경기 6실점(선방율 81.3%)의 안정적 기량으로 우승을 이끌었다. 장점인 킥 능력을 매 경기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단점이었던 공중볼 처리도 안정적으로 해냈다. 결승전 후반엔 절묘한 코스로 빨려 들어가던 상대 슈팅을 쳐내는 동물적인 선방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올 시즌 리그 출전 0경기. 카타르로 향할 때까지도 “뛸 거라는 생각을 하나도 못했다”는 후보 골키퍼는, 언제든 제 몫을 할 수 있게 준비돼있었던 것이다.

비결은 조수혁의 멘털에 있다. K리그1 주전 골키퍼는 12명이 전부다. 후보 골키퍼는 지루한 인내의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유독 힘들어하는 선수가 많다. 조수혁도 마찬가지였다. 리그 주전급 골키퍼의 기량을 갖췄음에도 2008년 프로 진출 후 59경기 출전이 전부고, 풀 주전 시즌은 1시즌 밖에 없다.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어 스킬이 미흡한 나머지 울산 이적 후 인터뷰에서 의도와 다른 발언을 해 인천 팬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조수혁은 좌절하지 않았다. ‘즐겁게 살자’는 인생의 모토가 있어서다. 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되,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역할을 즐겁게 소화하자는 것이다.

“테어 슈테겐을 좋아하는데, ‘나 자신을 보여줄 시간도 없는데 상대방이나 외부 환경에 긴장하고 영향 받을 시간이 없다’는 인터뷰 발언이 인상 깊었죠. 인생은 길어요. 오늘 경기만 있는 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있죠. 게임을 뛰든 못 뛰든 여유를 갖고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후보 골키퍼지만, 이번 ACL 우승으로 K리거가 할 수 있는 모든 우승을 경험한 '100점 축구인생' 조수혁.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런 태도 덕에 그의 삶도 풍요롭다. ‘조수혁’을 묻자, 후배들은 마치 자신의 인터뷰처럼 적극적으로 조수혁을 설명했다. 특히 후보 골키퍼들에게 조수혁은 단지 한 명의 선배가 아니라 ‘친 형’ 같았다. 지난 시즌 울산에서 서울 이랜드로 이적한 문정인(22)은 4년차에 1경기만 뛴 후보 골키퍼다. 올해엔 부상까지 입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 문정인은 ACL 경기를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봤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조수혁이 큰 보상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뭉클한 감정 뿐 아니라 동기부여도 받았다고 했다.

“경기에 못 뛰는 후배들이 감정을 티내지 않아도 수혁이 형 눈에는 보이나 봐요. 먼저 다가와서 밥 먹자고 해주시고, 골키퍼 장갑도 선물로 주셨죠. 뛰지 못해도 훈련장에서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후배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귀감이 되는 형이에요.”

넘어지고 멍들면서도 골키퍼가 재미있었다는 초등학생 선수는,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우승을 다 해본 K리거가 됐다. ‘선수’ 아닌 ‘인간’으로서도 누구보다 성숙했던 조수혁과의 23일 인터뷰는, 인터뷰어까지 팬이 되게 만들어 놨다. “조수혁의 축구 인생은 몇 점이냐”는 마지막 우문(愚問)에, 조수혁은 현답(賢答)을 내놨다.

“저는 100점 같아요.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축구를 하고 싶어도 못 뛰는 선수가 많잖아요.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축구를 오래 해나갈 수 있다는 게 그 자체로 제겐 100점입니다.”



이동환 기자 

기사제공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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