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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29)] '파워 스윙맨' 변청운

‘저주받은 학번’, ‘스타트 학번’ 등으로 불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94학번’은 특별한 학번으로 꼽힌다.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 첫세대, 졸업반 시절 IMF 발생 등 국가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때 마다 꼭 선두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이른바 빡샌 학번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변화의 시작에서 가장 먼저 달려준 당찬 학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뭐든지 처음이 유독 많은 94학번은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도 스타트를 끊는 역할을 했다. 부동의 최대어 현주엽이 신생팀 SK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며 ‘하마 잡았다’라는 타이틀로 각종 언론이 도배가 되었던 가운데 2순위부터는 그야말로 쉽게 예상하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지명이 펼쳐졌다.
장단신 외인제도로 인해 토종 빅맨의 가치가 급등하며 경희대 센터 윤영필이 2순위로 SBS(현 KGC)에 지명되는가하면 고려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야전 사령관 신기성은 7순위까지 밀린 끝에 나래(현 DB)의 선택을 받았다. 아무리 예상이 쉽지않은 드래프트였다고하지만 그야말로 혼전양상이 거듭됐다. 그런 가운데 4순위 지명권을 가졌던 나산(현 KT)도 의외의 픽으로 주목을 끌었다. 대학 무대에서 꽤 이름을 날렸던 선수들이 남아있는 가운데 건국대 포워드 변청운(48‧192cm)을 지명한 것이다.
물론 지금에와서 보면 당시 변청운 4픽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소 높을 수는 있겠지만 나산은 이름값보다는 팀 색깔과 잘맞는 선수를 선택했다. 변청운은 당시 대학무대 인기를 이끌었던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출신이 아닌 관계로 팬들 사이에서 유명세는 적었다. 하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짜 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3번을 보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4번까지 가능했던 그는 지금 기준으로보면 단신에 속하겠지만 190cm초반대 빅맨도 많았던 당시로서는 심하게 언더사이즈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에 특화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고르게 할줄 알고 활동량, 파워가 좋은 유형이었던지라 지도자 입장에서는 쓰임새를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선수였다.
평균 4.1득점, 1.7리바운드의 정규시즌 성적만 놓고보면 변청운의 성적은 지극히 평범한 식스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으니 그의 출장 횟수다. 그는 11시즌 동안 384경기(플레이오프 18경기 제외)를 소화했다. 공헌도가 없는 선수였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경기를 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변청운하면 떠오르는 시리즈도 있다. 그는 코리아텐더(전 나산)가 2002~03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헝그리 돌풍을 일으키던 시절 토종 에이스 역할을 해내기도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주전 3번으로 출전해 1, 2차전 합계 3점슛 10개(10/14)를 꽂아넣는 엄청난 활약으로 주희정, 서장훈이 버티던 서울 삼성을 무너뜨리는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주로 궂은 일에 전념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공격에서의 폭발력 또한 겸비하고 있던 전천후 포워드였다.

“늘 배우는 자세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Q.어떻게 지내세요?
은퇴후 학원 스포츠 쪽으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대경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현재는 성남초등학교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아이들과 함께 하다보니 저 스스로도 배우는게 많고 선수 시절에 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감정도 느끼게 되는 등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듯 합니다.
Q.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까지 모두 맡아보게 되셨어요. 나이대가 다르니 지도 방식도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하핫…, 공교롭게도 그렇게 됐네요. 어차피 학원 스포츠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부분은 비슷해요. 단순히 농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선생님 역할도 상당 부분 겸해야하는지라 인성, 학업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신경써줘야 하겠죠. 어쩌면 농구를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어가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시기잖아요. 기본적인 성격, 성향 등은 더 어릴 때 만들어지겠지만 중, 고교 시절에 굳어지고 다듬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느냐에 따라 많은 변화가 올수있어요. 초등학교같은 경우는 어린나이인만큼 좀 더 세심한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겠죠. 더불어 농구를 막 시작하는 단계인지라 기술적인 것보다는 해당 스포츠에 대한 애정, 관심 등을 만들어주는게 우선인 듯 싶어요. 아무리 신체조건이 좋고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마음이 크지못하면 의미없잖아요. 힘든 운동선수로서의 시간을 보내려면 끈기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먼저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지도자 역할이 중요하죠. 어떤 농구관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아이가 농구에 대해 가지게 되는 첫인상이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요.
Q.초등학교 농구부 지도자를 하시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현 시점에서는 선수 수급입니다. 일단 선수들이 어느 정도 들어와야 지도 방향을 잡고 열성적으로 가르쳐볼텐데 점점 선수 수급하기가 많이 어려워지고 있어요. 초등학교때 농구를 시작했다는 예전 농구인들 얘기들어보면 ‘선생님이 하라고해서 그냥 시작했어요’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이제는 정말 옛날 말이 되어버렸어요. 클럽이 많이 생기면서 대부분 그쪽으로 가요. 클럽에서 농구를 하다가 적성에 맞다싶으면 중학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죠. 좋다 나쁘다는 말하기 쉽지않은 문제에요. 개인적으로는 나쁘지않다고도 생각해요. 그만큼 생활스포츠로서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제가 초등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고있기에 가지고있는 고민일 수도 있겠네요.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초등학교 농구부도 나름대로 장점이 많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웃음)

Q.예전 인터뷰글을 보니까 아이들을 가르키는 과정에서 ‘후회되는 부분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점에서 후회한다는 말인지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초등학교에 오기 전에 배재고등학교에 있었어요. 거기는 고등학교잖아요.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고등학교 농구부의 최종 목표는 대학이에요. 대학을 가야 원하는 선수 생활로의 길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제 개인적인 교육관을 떠나서 현실이 그래요. 저는 지도자로서 최대한 많은 제자를 대학에 진학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너무 그쪽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지도를 했던 것 같아요. 제자들에게 여유도 주고 농구에 대한 애정도 심어주고 그런 과정도 필요했을텐데 지나치게 강성으로 밀어붙였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 밖에 없다고 착각한 부분도 있습니다. 저도 농구를 했잖아요. 지도자 이전에 농구 선배로서 칭찬과 격려도 해주면서 대학 진학에 대한 부담도 좀 덜어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스럽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도 좀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나의 인간으로서는 그런 과정도 겪어가면서 배우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에게는 제가 배운 것을 돌려줄 수 없기에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Q.늘 배우고 성장하려는 마음이 있으신 것 같아요.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잖아요. 여전히 부족하지만 소통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한자리에 멈춰서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굳어버린 생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는 없으니까요.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까지 아이들의 나이가 다르고 그로인해 주변 환경도 바뀌다보니까 변화에 대해 완벽하게 발 맞추지는 못해도 최소한으로 따라가려는 노력은 해야겠더라고요.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하고 각종 매체가 활성화되어서 아이들간에도 몇 살만 차이나도 확확 성향이 달라져요. ‘나때는, 나때는…’하다가는 맞출 수가 없죠. 현재는 초등학교를 맡고 있으니까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멘탈, 자존감 같은 것을 심어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지금 농구하는게 행복하다고 느껴야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더욱 열정을 가져갈 수 있으니까요. 말투, 들어주는 자세는 물론 신세대 언어까지도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알아야 소통을 하고 그렇게함으로서 ‘선생님은 좀 통하네’라는 믿음도 주면서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죠.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입니다. 아마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내내 배워가야 될 부분같아요.

“현주엽이 그렇게 싸움을 잘했냐고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것인가요?
농구는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중학교 들어와서 농구공을 잡게됐어요. 중학교 조차도 일반 학생들처럼 진학한 케이스에요. 입학할 당시만해도 농구선수를 하게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2학년때 182cm까지 키가 크면서 눈에 띄게 된 것 같아요. 지인중에 중앙대에서 농구를 했던 분이 계신데 ‘청운이가 체격조건도 괜찮은 것 같은데 농구를 시켜보면 어떻겠냐?’라고 권하게되면서 시작된거죠. 본래 성남 출신인데 농구를 하기위해 대경중학교로 전학을 가게됐어요.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당시 또래 중에서 키가 큰 편이었던지라 센터를 봤어요. 신장도 신장이지만 이전까지 농구공을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어 기본기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아무래도 드리블을 치면서 코트를 폭넓게 돌아다닐 역량은 안됐겠죠. 힘도 좋고 하니까 일단 골밑에 박아놓고 플레이를 시키셨던 것 같아요. 그게 최선이었고요. 지금이야 포지션 구분이 세세하게 이뤄졌지만 당시 저는 뭐가 뭔지도 잘몰랐어요. 그냥 안에 들어가서 시키는 것만 한거죠.
Q.학창시절 농구를 하시면서 ‘와, 정말 잘한다’고 느낀 선후배가 있으실까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앞뒤로 정말 잘하는 선수가 많았죠. 황금 세대였잖아요. 그냥 같은 학번으로 생각해보면 (현)주엽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어요. 워낙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엄청 잘했잖아요. 정말 보면서도 ‘우와, 진짜 잘한다. 어떻게 저런 친구가 다 있는 것이지’하면서 동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승부욕이 강한 편이지만 당시 주엽이는 그런 것을 넘어서서 감탄만 나오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선후배도 중요했지만 주로 많이 경쟁해야되는 쪽은 동기인지라 같은 학번에 주엽이 같은 선수가 있다는 것은 큰 동기부여가 됐죠. 그래도 따라는 가고 싶었으니까요.
Q.학창 시절에는 1살차이도 민감하게 다가오잖아요. 동기들은 대부분 75년생이었을텐데 74년생으로서 불편하신 점은 없었을까요? ‘내가 형인데’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고요.
운동선수들은 학번으로 끊잖아요. 제가 선택해서 간 길인데 구태여 불편하고 싶지않았어요. 한 살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때요. 다같은 동기인데요. 괜히 형대접 받으려고하면 족보도 꼬이고 더 힘들어져요. 어릴 때는 그것 때문에 살짝 스트레스도 받고 그러기는 했는데 어느 순간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하더라고요. 지금도 다들 친구로 지내고있어요. 나이 한 살 때문에 티내고 그러면 결국 저만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Q.다소 뜬금없는 질문같지만 당시 74, 75년생들 앞뒤로 현주엽이 싸움짱으로 명성이 쟁쟁했잖아요. 김택훈도 유명했고요. 그래도 해당 세대이기에 좀 아실까 싶어서요.
글쎄요. 싸움이라면 제가 더 유명하지 않았을까요? 제 이름은 들어보지 않으셨나요?(웃음) 주엽이가 싸움으로 그렇게 유명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키와 체격이 있고 힘도 워낙 좋아서 약한게 더 이상하겠지만 특별한 명성(?) 그런 것은 들어본적 없어요. 제가 봤던 주엽이는 싸움 이런 쪽으로는 크게 티를 안냈어요. 성격이 워낙 유쾌하고 좋았거든요. (김)택훈이도 마찬가지고요.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기들끼리는 사이좋게 지냈어요. 특별한 신경전도 없었고요. 운동선수들 중에는 센 사람들이 워낙 많아요. 자칫 시비라도 붙으면 피차 손해에요. 서로 내려놓고 공존하는거죠.
Q.대경상고 재학 시절 센터로 활약하는 등 아마무대에서 주로 빅맨으로 활약하셨어요. 신장을 감안하셨을 때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려웠죠. (이)은호나 (윤)영필이 등 동기중에서 좋은 센터들이 많았어요. 신체조건에서 제가 가장 불리했습니다. 다행히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안밀리는 편인지라 힘으로 맞붙었죠. 몸싸움하고 충돌하고 그런 것은 자신있었거든요. 2학년때까지는 정말 힘들었어요. 센터 포지션을 볼 수 있는 선수가 저밖에 없어가지고 혼자 골밑에서 싸운다는 부담감도 상당했습니다. 다행히 3학년때 신입생으로 (이)규섭이가 들어와서 부담이 많이 줄었던 기억도 납니다.

“현주엽의 휘문고를 넘어섰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Q.언더사이즈 빅맨으로 뛰면서 수비와 공격 어떤 쪽에서 더 힘드셨을까요?
아무래도 수비죠. 신장에서 밀리다보니 손해보는 것도 많았어요. 몸싸움 등은 힘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되는데 리바운드 쟁탈전같은 것 할 때 참 어렵더라고요. 같이 뛰어도 약간의 차이 때문에 리바운드를 많이 빼앗겼어요. 기껏 수비잘해놓고 마지막에 리바운드를 못잡아내면 도로아미타불이거든요. 그것 때문에 감독님께 많이 혼나고 저도 속상하고 그랬어요. 정말 ‘신장이 깡패다’는 말은 맞아요. 농구라는 종목에서 신장차이는 극복하기 정말 어려워요. 그나마 힘이라도 있었으니까 망정이지 힘에서마저 밀렸다면 빅맨 자체를 못했을겁니다.
Q.3점슛도 그런 의미에서 장착하신 것이겠죠? 당시에는 빅맨에게 외곽슛을 요구하는 시대는 아니었잖아요.
3점슛은 고3 졸업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어요. 당시 감독님이 저를 불러서 ‘청운아, 아무래도 네 신장으로 살아남으려면 3점슛 능력을 갖춰야될거다’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었어요. 고등학교 무대에서도 신장에서 어려움이 많은데 정말 큰 선수들이 많은 대학, 이후 프로(당시는 실업)에서는 지금처럼해서는 살아남기 쉽지않을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몸에 배인 플레이 스타일이라는게 있잖아요.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빅맨으로 뛰던 선수가 외곽슛을 갖춘다는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더라고요. 대학올라가서 정말 노력했어요. 하루 평균 500개 이상씩 쏜 것 같아요. 다행히 대학에 가서도 감독, 선배님들께서 많이 배려해주시고 도와줬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고 3때 대통령기 결승에서, 현주엽이 이끌던 휘문고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어요. 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산왕을 이긴 그런 분위기였을까요?
하하핫…,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저희가 약하지는 않았지만 휘문고 자체가 워낙 강했어요. 라이벌조차 없을 정도로 강했어요. 전국 ‘원팀’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만화속 산왕과 비교될만 했겠네요. 실제로 당시 저희한테 진 것 빼고는 나머지 대회는 모두 우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합 전까지만해도 저희가 휘문을 잡아낼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을거에요. 이미 당시로서 국가대표 레벨인 주엽이를 비롯해서 영필이까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죠. 저희조차도 ‘우리가 휘문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승리한다는 생각보다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생각하고 경기에 임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듯 싶어요. 지금까지도 추억으로 가지고 있을만큼 의미있는 우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현주엽과의 매치업은 어땠나요?
어휴…, 많이 힘들었죠. 덩치크고 힘좋은 선수가 빠르고 센스까지 있었잖아요. 내외곽을 오가며 공격을 주도하면서도 적재적소에 패스도 척척 뿌려댔던지라 어디서 어디까지 막아야할지 가늠이 안되는 레벨이었어요. 그냥 미친 듯이 따라다니고 몸싸움하고 열정하나로 부딪혔습니다. 규섭이도 많이 도와주는 등 팀수비가 전체적으로 좋았지않나싶어요. 어릴 때는 분위기에도 금세 휩싸이잖아요. 당시 응원하는 분들도 많았고 그로인해 저희들도 평소 이상의 힘을 발휘해서 이변을 만들어 냈지 않나 싶습니다.
Q.프로에서는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프로라는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화가 있어야 했어요.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넘어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프로에서도 바뀌어야 산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죠. 저의 신체적 조건에서 무엇을 장착해야 경쟁력을 가져갈 수 있을지, 더불어 다른 이들의 눈에 띄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에 대해서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이름 값이 아주 높은 스타 출신도 아니고 일단 저라는 선수의 장점을 어필해야 기회도 더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슈팅력 보강에도 힘을 썼고 활동범위도 넓게 가져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체 4순위, 저도 놀랐어요”
Q.KBL첫 신인드래프트에서 무려 전체 4순위로 지명받았어요. 뜻밖이라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맞습니다. 의외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놀랐어요.(웃음) 워낙 유명하고 잘했던 선수가 많았던지라 1라운드 안에서만 지명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는데 4순위에서 뽑아주셔서 기쁨반 놀라움반이었어요.
Q.이름 값보다는 선수의 기량 자체와 성장 가능성에 의미를 둔 픽이 아닐까 싶습니다. 팀에서는 지명 이유에 대해 어떻게 말했나요?
당시 나산에서는 이민형 선배님하고 비슷한 스타일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산은 전신 기업은행 시절부터 김상식, 이민형 선배님이 팀을 이끌고 있었잖아요. 내외곽을 넘나들며 전천후로 활약해 줄 수 있는 포워드로 지명 방향을 정하고 저를 선택한 것이죠. 거기에 맞춰서 생각해보면 지명순위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1순위 주엽이 정도 빼고는 다들 어느 한쪽에 특화된 선수인지라 이것저것 다할 수 있는 포워드로는 제가 어울리기도 하거든요.
Q.실질적으로 프로 무대에 와서 스몰포워드를 보신거죠?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3, 4번을 오갔죠. 이것저것 팀에서 시키는데로 하는 유형이었던지라 당시 플레이를 보면 딱히 스몰포워드다 파워포워드다 규정하기도 어려웠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저는 4번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제가 좀더 자신있고 익숙한 포지션이기도 했고요. 공격에서는 그랬지만 수비만 생각하면 1번에서 5번까지 다해봤던 것 같아요. 주로 식스맨으로 뛸 때가 많은지라 골밑 펑크나면 골밑으로 들어가고 가드진이 파울이 많아지면 거기에 투입되어서 상대 앞선 막고…, 힘도 좋으면서 느리지도 않았던지라 감독님께서 활용법을 그렇게 가져가셨지 않나싶어요. 이상민 형님까지 수비한 적이 있다니까요. 너무 여기저기 오가니까 정신없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킨 역할의 소화가 가능하니까 믿고 맡겨주셨겠죠. 제가 어필할 수 있는 경쟁력이기도 했고요.
Q.나산은 다른 팀들에 비해 여건이 안좋았습니다. ‘왜 하필 이팀이야’라고 후회한 적은 없으신가요?
없다고하면 거짓말이겠죠. 처음에는 잠깐 그런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1라운드에서 4순위로 뽑아주신 고마움이 컸던지라 금방 사라지더라고요. 높은 순번으로 저를 뽑아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자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그렇지않아도 깜짝 지명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던 상황에서 진짜로 못해버리면 실패한 픽이 되버리는 것이잖아요. 그런 얘기를 듣기는 싫었습니다. 믿어준 만큼 잘해서 보여줘야죠.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구단에 들어갔다해도 경기를 많이 뛰지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디서든지 나만 잘하면 가치는 인정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Q.당시 나산이 모기업 사정 때문에 선수단 환경이 열악했다고 지금까지도 회자되잖아요. 어느정도였나요?
열악했죠. 아파트 몇채를 잡아놓고 숙소로 썼는데 덩치 큰 선수들 여럿이 한꺼번에 있는지라 많이 비좁았죠. 식사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식당 아주머니들께서 음식도 잘 만들어주셔서 맛있었어요. 하지만 간식같은 부분에서는 타팀에 비하면 소홀했고요. 무엇보다 체육관 부분에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장애인 재활체육관을 함께 썼어요. 그런 점에서 불편함이 좀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시에 그렇게까지 힘든 것을 많이 느끼지는 못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다른 팀이 어떤지를 잘몰라서 비교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 그런 것이 적었거든요. ‘그냥 우리 팀이 조금 환경이 떨어지나보다’ 그 정도만 느꼈고, 프로 선수로서 경기에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팀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정말 가족같았습니다. 돈 많은 팀으로 트레이드되어 가는 선수들도 ‘그냥 여기에 남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밖에서 우려하시던 것만큼 힘들지만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이지 진심으로, 저희는 마음이 부자였습니다.

Q.02~03 시즌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팀도 업셋을 만들어냈지만 변청운이라는 선수도 중심에서 활약이 좋았거든요.
당시 시리즈는 못잊죠. 그때 제가 시리즈 MVP를 받았어요. 선수단 분위기가 한번 해보자고 똘똘 뭉쳐있었던지라 어떤 팀을 만나도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서로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면서 경기하다보니까 집중력도 한층 강해지고 뭐랄까 정말 하나의 팀으로서 단단해진 상황이 아니었나싶어요. 다들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고 하니 더 이겨야겠다는 오기도 들었고요. 슛이 하나 들어갈 때마다 모두가 함께 기뻐하니 다들 평소 이상의 힘을 냈던 것 같아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쁨이 배가 된 시리즈였습니다. 선수들, 코칭스탭은 물론 저희 밥해주던 식당아주머니께서도 목놓아 응원하고 함께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한가족이었죠.
Q.이것저것 고르게 잘하는 스타일이다보니 외국인선수 유형, 팀 시스템에 따라 출전시간이나 기용폭이 들쭉날쭉했어요.
변동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힘, 기동성, 순발력 등이 다 되다보니까 공격보다는 수비 쪽으로 넓게 활용하시는 감독님들이 많으셨어요. 개인기록에서는 손해였겠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천후로 수비가 가능했기에 긴 시간 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않았을까요. 기록도 중요하지만 감독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비중을 많이 두시거든요. 말씀하신데로 각팀은 감독님마다 색깔이 다르고 외국인선수 유형에 따라 전력구성도 달라지는 등 자주 상황이 달라져요. 한시즌내에도 여러번 바뀔 때도 있죠. 아무래도 저는 식스맨 으로서 어떤 때는 많이 뛰고 어떤 때는 기회를 거의 못받고 그랬죠. 솔직히 컨디션 관리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팀에서 저에게 요구하는 바가 그런 것인지라 잘 맞춰보려고 늘 노력했습니다.
Q.함께 뛰어본 외국인선수 중 인상 깊었던 선수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힘든 시절을 함께 했던 에릭 이버츠, 안드레 페리가 많이 생각나요. 둘 다 검증된 선수들인만큼 기량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인성이 참 좋은 외국인선수들이었어요. 외국인선수들 같은 경우는 우리와 문화가 다르잖아요. 식성도 그렇고, 성향도 그렇고…, 그 선수들이 다르게 행동한다고해도 아쉽기는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거든요. 다르니까요. 하지만 이버츠와 페리는 특별대접을 원하지않고 항상 국내선수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좋았어요. 팀을 위해 자신들이 내려놓은 부분도 많았을거에요. 이렇게 외국인선수들까지 팀에 녹아들다보니까 팀 분위기가 안 좋을 수가 없었죠.

“자식은 생각만으로도 늘 설레는 그런 존재같아요”
Q.최근 농구인 2세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가운데 큰딸 변소정 양이 2021~22 WKBL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되면서 부녀 농구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맞습니다.(웃음) 소정이가 드래프트되면서 저도 같이 언급이 됐죠. 농구인 2세들이 요새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저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솔직히 제가 드래프트되었을 때보다 열배는 더 떨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긴장했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아내와 함께 지켜봤었는데 잠깐 사이 숨이 턱턱 막혔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거나 높은 순위로 뽑혀서 더욱 기분좋았고요. 앞으로 정말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농구인 부모가 다 그럴걸요. 본인 경기는 담담하게 뛰더라도 자식 경기는 움직임 하나하나까지도 손에 땀을 쥐어가며 쳐다보게 됩니다. 자식이란 그런 존재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늘 보아왔어도 아주 작은 것 하나만으로도 설렘을 주는 그런 존재?
Q.둘째 따님도 농구를 하고있나요?
변하정이라고 현재 분당경영고 2학년에 재학중이에요. 첫째도 거기 나왔거든요. 공교롭게도 딸 둘 모두 농구를 하게됐네요. 플레이 스타일도 언니 소정이랑 비슷해요. 내외곽을 오가면서 다양하게 활약할 수 있는 유형의 선수에요.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워낙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녀석인만큼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어요.
Q.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은 어떤 아빠인가요? 다정한 아빠 혹은 츤데레 아빠 그런 것 있잖아요.
하하핫… 저는 둘다인 것 같아요.(사실 딸이야기 나오는 순간부터 목소리톤이 올라가고 자꾸 웃는 것에서 이미 답변은 나왔다) 쳐다만봐도 좋고, 생각만해도 좋고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우리 딸이라서 좋아요. 지금도 보고싶고 지금도 목소리 듣고 싶고 그래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변청운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억하고 알아봐 주시는 팬 분들을 볼 때마다 ‘아, 농구하기를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어떻게 사랑을 돌려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제가 하는 일이 유망주를 발굴해서 키우는 것인지라 미래의 꿈나무를 잘 가르쳐보도록 힘껏 정진하겠습니다. 더불어 이번에 큰 딸 변소정이 프로 신인드래프트에 지명되면서 제 이름이 다시 한번 언급되었는데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선수지만 좋은 자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와 성원부탁드립니다. 더불어 둘째 변하정도 기억해주세요. 학원 농구 지도자로, 딸바보 아빠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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