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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현대건설이 ‘압도적 강함’이었다면 지금의 현대건설은 ‘끈끈한 강함’으로 무장했다

드루와 0

 

 

시계를 2022~2023 V리그가 한창 진행 중이던 약 1년 전으로 돌려보자. 여자부는 현대건설의 독야청청(獨也靑靑)이었다. 개막 후 내리 15경기를 내리 이겼다. 단기 임팩트로는 사상 최고라고 할 만했다. 세터 김다인의 안정된 경기 조율 아래 야스민 베다르트(現 페퍼저축은행)의 파괴력 넘치는 공격, ‘블로퀸’ 양효진과 이다현이 버티는 미들 블로커진에 황민경(現 IBK기업은행), 고예림, 정지윤까지 공수 밸런스가 잘 잡힌 아웃사이드 히터진, 리베로 김연견의 미친 디그까지. 그야말로 공수에 걸쳐 완벽했다. ‘압도적인 강력함’이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당시의 현대건설이었다.
 
그러나 지난 시즌 현대건설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었다. 야스민이 13경기만 뛰고 허리 디스크로 전열에서 이탈한 게 그 시작이었다. 토종 아포짓 황연주가 ‘난세의 영웅’처럼 오랜 만에 주전으로 출전해 전성기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며 버텨내긴 했지만, 야스민의 공백을 국내 선수들끼리 메우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탈이 났다. 건강하기만 하면 최강의 공격력을 뽐내는 야스민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면서 대체 외국인 선수 이보네 몬타뇨가 2월에야 영입됐지만, 이미 현대건설의 시스템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랜 기간 1위를 지켰지만, 결국 흥국생명에게 정규리그 1위 자리를 내주고 2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개막 15연승을 하고도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하지 못한 박탈감은 생각보다 컸다. 3위로 올라온 도로공사에게 플레이오프에서 2전 전패로 패퇴해야 했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너무나 초라했던 현대건설의 2022~2023시즌이었다.
 
시즌 뒤 현대건설은 야심차게 전력 보강에 나섰다. V리그에서 처음으로 FA 자격을 얻은 ‘배구여제’ 김연경을 영입하려 했다. 협상 막판 김연경이 흥국생명 잔류로 방향을 틀었다. 김연경과의 협상에 집중하느라 오랜 기간 팀의 주장을 맡았던 황민경이 IBK기업은행으로 FA이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전력 보강은커녕 손실만 입은채 FA 시장을 마무리했다.

 

 

 

외국인 선수를 GS칼텍스에서 2년간 뛰었던 모마(카메룬)로 바꾸고, 올 시즌부터 도입된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로 위파이 시통(태국)을 영입한 게 달라진 전부였다.
 
2023~2024 V리그 개막 전, 모두가 입을 모아 흥국생명을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았다. 김연경이 잔류했고, 옐레나(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주저 앉혔다. 미들 블로커 김수지도 FA로 영입해 코트 가운데도 보강했다.

 

 

 

그러나 시즌이 중반으로 향하는 지금, 선두 자리는 현대건설의 차지다. 20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과의 3라운드 맞대결에서 세트 스코어 3-1 쾌승을 거두면서 승점 40(13승4패) 고지를 먼저 밟으며 흥국생명(승점 36, 13승4패)과의 격차로 더 벌렸다.
 
이날 현대건설의 승리가 더욱 값진 것은 팀 시스템의 핵심인 국가대표 주전 세터 김다인의 부재 속에 거뒀기 때문이다. 김다인은 독감으로 이날 경기에서 빠져야 했고, 강성형 감독은 2022~2023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뽑은 2년차 신예 세처 김사랑에게 데뷔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줬다.

 

 

 

승점 6이 걸려있는 빅매치에 데뷔 첫 선발 경기를 치른 김사랑은 2세트까지는 공격수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현대건설은 1세트에 5개, 2세트에 4개 등 1,2세트에만 9번의 공격이 흥국생명 블로커들에게 가로막혔다. 블로킹 당하는 것이 오롯이 세터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2년차 햇병아리 세터에겐 큰 부담으로 다가올 법도 했다.
 
경기 전 강 감독이 김사랑을 가리켜 “상대를 속이는 재기발랄한 토스는 없지만, 안정적인 경기 운영이 장점”이라고 한 말대로, 김사랑은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했다. 모마와 양효진, 위파이의 삼각편대를 골고루 활용하며 팀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1세트를 내주긴 했지만, 19-24로 뒤진 상황에서 내리 4점을 내며 23-24까지 따라붙은 게 신호탄이었다. 그 분위기를 2세트에 그대로 이어간 현대건설은 2세트 초반을 8-2까지 앞서 나갔다. 2세트 막판 흥국생명이 맹추격해 24-23까지 따라붙었지만, 모마의 퀵오픈이 흥국생명 코트에 떨어지며 세트스코어 1-1 동점을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현대건설은 3세트를 원사이드하게 잡아냈다. 3세트가 크게 벌어지자 흥국생명 아본단자 감독은 김연경을 미리 빼며 4세트를 대비했다. 김연경이 4세트에 다시 분전하면서 접전 양상으로 치러졌지만, 선두 수성과 연승행진을 ‘9’로 늘리려는 현대건설 선수들의 의지는 강했다. 기어코 4세트까지 가져오며 선두 수성에 성공했다.
 
경기 전만 해도 강 감독은 “김사랑과 이나연을 두루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했지만, 김사랑은 1세트에 잠깐 이나연과 교체된 것을 빼면 경기 내내 코트를 지켰다. 기본에 충실한 토스워크로 모마(24점), 양효진(15점), 위파이(14점), 이다현(7점) 등 주전들을 골고루 활용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1년 전의 압도적인 맛은 없지만, 코트를 밟는 선수 모두가 자신이 해야할 몫을 다 해내는 ‘끈끈한 강함’으로 김연경-옐레나의 ‘쌍포’를 앞세운 흥국생명을 이겨낸 것이다.

 

 

 

경기 뒤 강 감독에게 ‘올 시즌을 이렇게 잘 치를 것으로 봤느냐’고 묻자 “1라운드 때는 걱정이 많이 됐다. 그래도 위파이가 리시브는 약하지만, 득점을 잘 내주고 있다. 모마도 불안감은 있었지만,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 기존 선수들의 호흡이 더 잘맞아 떨어지면서 지금의 성적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선 양효진은 올 시즌 선두 질주의 비결로 소통을 꼽았다. 그는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서로 소통이 잘 된다. 처음엔 모마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불편해했다. 근데 이제는 모마도 성격이 활발해져서 같이 파이팅하고 있다. 위파이는 우리가 ‘쟤 한국 사람 아니야?’라고 할 정도로 토종 선수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까지 소통하고 있다”고 답했다.

 

 

 

1년 전 현대건설과 비교하면 어느쪽이 더 강한 것 같느냐는 질문에 양효진은 난감해했다. “밸런스 게임인건가요? 아~ 꼽기 정말 힘든데..”라고 입을 뗀 양효진은 “지난해엔 야스민에 (황)민경이, (고)예림이가 다 역할을 잘 해줘서, 올 시즌이 더 강하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다만 올 시즌에 확실한 것은 모든 선수들이 자기 역할을 다 해주는 것 같다. 지난 시즌의 우리가 좀더 화려하고 압도적인 맛이 있었다면, 지금은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 배구가 기록이나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않나. 선수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고 답했다.
 

기사제공 세계일보

인천=남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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