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배구에서도 아무리 빼어난 공격수들이 여럿 있어도 이들에게 공을 올려주는 세터의 토스 구질이 나쁘거나 상대 블로커들의 움직임을 순간 포착하는 능력 등의 경기 운영이 떨어지면 소용이 없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4~2025 V리그 남자부에서 무적행진을 보이고 있는 현대캐피탈의 숨은 공신은 세터 황승빈(32)이다.
현대캐피탈은 지난 15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삼성화재와의 맞대결에서 세트 스코어 3-0 완승을 거두며 파죽의 12연승을 달렸다. 승점 3을 챙겨 승점 55(19승2패)가 된 현대캐피탈은 2위 대한항공(승점 40, 12승8패)과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그야말로 ‘독야청청’ 현대캐피탈이다.
시즌 전부터 대한항공과 더불어 ‘양강’으로 평가받았던 현대캐피탈이었지만, 그 전망이 무색하게도 홀로 훨훨 날고 있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2순위 지명권으로 역대 최고의 외인으로 꼽히는 레오(쿠바)를 품은 게 가장 큰 원동력이다. 토종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한 허수봉과 레오가 이루는 ‘쌍포’는 현대캐피탈이 자랑하는 ‘전가의 보도’다. 레오는 득점 2위(411점), 공격 종합 3위(55.80%), 허수봉은 득점 4위(364점), 공격 종합 2위(56.32%)에 올라있다.
이들에게 양질의 토스를 제공해주는 게 황승빈이다. 현대캐피탈은 지난해 9월 통영 KOVO컵대회를 마친 뒤 KB손해보험에 미들 블로커 차영석, 세터 이현승을 내주는 대신 황승빈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김명관의 군 입대로 호화 공격진을 꿰어줄 수 있는 세터 자리에 아쉬움을 느낀 현대캐피탈은 황승빈을 새로운 코트 위의 사령관으로 낙점한 것이다.
황승빈 입장에서도 현대캐피탈로의 이적은 기회였다. KB손해보험은 프랜차이즈 간판스타인 세터 황택의가 군 복무를 마치고 합류할 예정이었다. 황택의가 돌아오면 다시 백업세터로 밀릴 상황에서 현대캐피탈로 이적하면서 코트 위에서 뛸 시간을 얻게 됐다.
인하대 시절 신입생 때부터 주전으로 뛰며 재능을 인정받았던 황승빈은 2014~2015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순위로 대한항공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대한항공에선 황승빈에겐 좀처럼 주전 세터로 도약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현역 최고의 세터인 한선수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0~2021시즌까지 오랜 기간 한선수의 백업세터로 뛰던 황승빈은 2021~2022시즌을 앞두고 삼성화재로 이적하면서 드디어 주전 세터로 도약했다. 그러나 매 시즌 트레이드 대상이 되며 본의 아니게 ‘저니맨’이 됐다. 2022~2023시즌엔 우리카드로, 2023~2024시즌엔 KB손해보험의 유니폼을 받아들었다.
준수한 경기운영 능력과 빠른 토스워크로 주전 세터 감으로 인정은 받긴했지만, 최고 세터 반열에는 살짝 모자란 평가를 받아온 황승빈은 데뷔 11년차 만에 제대로 기회를 잡은 모양새다. 현대캐피탈에는 레오-허수봉의 ‘쌍포’ 외에도 아시아쿼터 신펑(중국), 미들 블로커 최민호-정태준까지 양질의 공격수가 넘쳐난다. 황승빈으로선 특정 공격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공격 루트를 활용해 자신의 경기 운영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장이 제공되어 있다.
올 시즌 현대캐피탈의 지휘봉을 잡은 프랑스 출신의 ‘명장’ 필립 블랑도 황승빈의 활약에 흡족해하고 있다. 그는 “황승빈이 레오, 허수봉에게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속공이나 파이프(중앙 후위공격) 등의 다양한 옵션으로 경기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며 치켜세웠다.
‘저니맨’ 신세를 벗어나 현대캐피탈의 주전 세터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황승빈이 지금의 활약을 이어가며 통합우승의 주역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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