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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연의 더 멘트] 배드 샷 크리에이터

드루와 0

 



[루키 = 원석연 객원기자] 하나은행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부천체육관에는 어김없이 빌리지 피플의 'In the Navy'가 울려 퍼진다. 1970년대, 미국에서 해군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이 모병곡은 힘찬 박수와 웅장한 브라스 전주로 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뒤 이런 가사로 노래를 시작한다.

"어디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세상을 누비며 보물을 찾아보는 건 어때? (Where can you find pleasure? Search the world for treasure)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네 꿈을 이룰 수 있는 바로 그곳. (Where can you begin To make your dreams all come true)"

지난 몇 년간 그저 공허하게만 들렸던 이 노랫말은 이번 시즌은 마치 하나은행의 승리를 예고하는 진군가처럼 들린다. 13승 3패, 승률 8할의 무적 함대. 만년 꼴찌 하나은행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오늘 박소희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기술이 떨어지는 건 가르칠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인드가 안 되는 건 안 돼요. 다른 감독님들이 좋은 선수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안 통해요. 오늘처럼 설렁설렁하고 자기가 할 것 안 하면...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저와는 함께 농구할 수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꼭 4개월 전, 부산에서 박신자컵을 치르던 하나은행의 라커룸은 싸늘했다. 미디어는 물론 리그 관계자들까지 모두 놀라게 했던 이상범 감독의 작심 발언. 덴소와의 경기를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터진 이 강도 높은 발언과 함께 박소희는 로스터에서 제외됐다.

"그때는 정말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간이었어요." 박소희가 그해 가을을 떠올렸다. "경기에 안 내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눈을 안 마주치셨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런데 저 대신 뛰는 (정)현이나 이런 어린 친구들이 또 잘했잖아요? 그러니까 더 마음이 이상한 거예요. 항상 기회를 받다가 아예 이렇게 배제가 됐는데, 팀은 또 돌아가니까... 하필 현이랑 제가 그때 같은 방을 썼었는데 현이한테 혹시라도 들릴까 봐 조용히 매일 밤 울다가 잠들고 그랬어요. 그땐 진짜 매일매일이 가슴이 찢어졌다니까요."

이상범 감독이 덴소와 경기 도중 박소희를 뺀 이유는 수비였다. 그런데 재밌는 건, 수비에서 '뚫려서' 박소희를 뺀 게 아니라는 것. 역설적으로 박소희가 '뚫리지 않는' 수비를 한 탓에 이상범 감독은 대노했다.

"감독님이 대회 전부터 계속해서 주문하신 부분이 있었어요. 선수들에게 '뚫리더라도 무조건 붙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원래 제가 수비가 약한 선수였잖아요? 그래서 저는 너무 앞으로 붙으면 뚫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조금 뒤로 처지면서 수비를 했거든요. 감독님이 화나셨던 부분이 그 부분이었던 거죠."

인천 청라로 돌아온 뒤에도 훈련장에서 박소희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다. 코칭스태프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박소희를 철저히 배제했다. 연습 경기, 체력 훈련, 웨이트트레이닝장 어디에서도 박소희를 찾지 않았고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그건 정말 소희니까 버틴 거예요." 통산 606경기를 뛴 베테랑 김정은이 얘기했다. "이것저것 다 겪은 제가 봐도, 감독님이 좀 심했다 할 정도로 소희를 강하게 몰아붙이셨어요.(웃음) 일부러 계속 소희를 빼고 팀 훈련을 돌리면서 '너 없어도 팀은 잘 돌아간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죠. 지금이야 이렇게 잘 됐으니 얘기하지만, 그것도 진짜 소희니까 버틴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희는 진짜 악바리 기질이 있거든요. 감독님이 안 봐주시니까 더 독하게 하더라고요. 인터벌도 계속 1등으로 들어오고, 그 힘든 훈련도 한 번을 안 빠졌어요. 제가 지금까지 본 박소희 중 가장 독한 박소희였다니까요."

산전수전 다 겪은 김정은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냉철한 훈육. 곁에서 지켜보던 아시아쿼터 선수 이이지마 사키에게도 이 풍경은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고. 그는 그 시간을 이렇게 떠올린다.

"뭐랄까... 그 과정에서 팀 전체 기준이 한 단계 올라갔다고 생각해요. 그때 당시는 분위기가 좋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감독님이 따로 얘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강하게 주신 거니까. 결국은 그게 다 소희의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버텨냈고 지금은 옆에서 뛰면서도 소희가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훈련에 매진하고 잠들기 전엔 홀로 눈물을 훔쳐야 했던 혹독한 가을. 이상범 감독이 다시 박소희의 이름을 부른 건 한참이 지나 일본 전지훈련을 갔을 때였다. 연습경기 도중 벤치를 돌아본 이상범 감독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박소희, 나와!"

이름이 불린 순간, 박소희는 한달음에 코트로 뛰쳐나가 자세를 바짝 낮췄다. 예전의 만년 유망주 박소희라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을 이 시간은, 투명인간 박소희가 수십일간 그토록 갈망했던 시간이었으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빠졌던 게 수비 때문이었으니까, 들어가자마자 수비 생각 밖에 없었어요. 박신자컵 때처럼 안 붙고 처지다가 뚫리면 어차피 또 교체될 거니까 '모르겠다. 이건 뚫려도 내 책임 아니야, 감독님 책임이야'하고 그냥 달려들었어요. 그런데..." 박소희가 웃었다. 

"아무리 바짝 붙어도 안 뚫리는 거예요. 심지어 한국 선수들도 아니고 그렇게 빠른 일본 선수들인데, 수비 못하는 제가 그렇게 달라붙어도 안 제껴지는 거예요. 왜냐면 비시즌 내내 체력이랑 수비 훈련을 그만큼 했으니까...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요. '아, 감독님 말 듣고 하면 되는구나'라고."

이상범 감독은 이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수비를 잘하고 못하고는 선수가 스스로 구분하는 게 아니에요." 이상범 감독의 말이다. "아마 버릇이었겠죠. 수비에서 한번 뚫리면 교체되고 그랬을 거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움츠러 든 거죠. '나는 안 돼, 나는 발이 느려'하면서 스스로 자존감이 내려간 거죠. 그걸 선수들이 다 스스로 깨게 하면서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소희 말고도 다른 선수들도요. 붙는다고 다 뚫리는 거 아니고 그리고 세상에 뭐 안 뚫리는 수비가 어디 있겠어요. 다 뚫리면서 배우는 거지. 그걸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사실 다 비슷해요. 전 기본을 안 지키는 선수는 남자농구에 있을 때도 다 똑같이 적용했어요. 두경민도, 강상재도, 김종규도 아무리 스타 선수나 유망주라도 저는 제 원칙과 안 맞으면 못 뛰는 거예요. 여기선 소희가 그중에 하나였던 거고. 그런데 그 이후로 열심히 하는 게 좀 보이더라고요. 기회를 줄 때가 됐다 싶었죠."  



 



이 냉정한 원칙주의는 하나은행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최근 4시즌 중 꼴찌만 3번, 지난 시즌 성적은 9승 21패. 만년 꼴찌 하나은행은 이번 시즌 13승 3패 81.3% 승률을 자랑하며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이지마 사키는 이상범 감독의 농구를 이렇게 정의한다.

"훈련을 하면서 감독님이 지적하시는 포인트나 화를 내시는 지점을 보면, 제가 생각하는 농구랑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작년 BNK에 처음 와서 뛸 때는 '아, 이런 개념도 있구나'하면서 새로운 걸 배운 게 많았다면, 올해 하나은행에서는 '아, 역시 농구는 이거지'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기준을 다시 확인하는 느낌입니다."

"심플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거죠. 수비에서 원카운트(공과 가장 가까운 수비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때, 공을 가진 선수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수비수가 누구인지 정리돼 있지 않으면 수비가 무너져요. 예를 들어 상대가 돌파를 했을 때, BNK에서는 그 상황에서 몸싸움이나 컨택에 대해서 먼저 강조해주셨어요. 하지만 '이 위치에서 누가 원카운트 수비수인지' 혹은 '원카운트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같은 세세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지적되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여기서는 '누가 가야 하지?'하는 순간이 생겼고, 그 한 박자 때문에 수비가 늦어지는 경우가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게 명확해요. 원카운트는 여기, 투카운트는 여기. 역할과 위치, 책임 소재를 아주 정확히 정리해주시니까 수비가 급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어요."

최고참 김정은도 이이지마의 의견에 동의한다. 여자농구 역대 최다 득점 그리고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 중인 리그의 살아있는 역사 김정은은 올시즌 하나은행을 보면서 14년 전 우리은행을 떠올린다고. 꼴찌 우리은행에 위성우 감독이 부임하면서 단숨에 1위로 올라선 바로 그 시즌이다.

"우리 팀이 몇 년 동안 꼴찌를 하면서 드래프트에서 계속 앞 순번에 있는 선수들을 모았잖아요? 앞 순번에 있는 선수들의 특징은 다들 학교에서 날고 기는 에이스였기 때문에 다들 볼 만지는 것 좋아하고, 화려한 걸 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감독님이 오시고 소희를 본보기로 해서 기본기에 대해 강조하시다 보니, 어린 선수들의 체질이 완전히 다 바뀐 거죠. 공격에서는 아무리 배드 샷을 쏴도 지금껏 한번도 뭐라 하시는 법이 없고, 슛 못 넣었다고 교체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수비랑 기본기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어요. 스크린 수비 하나 못하고, 리바운드 앞에서 그냥 내주면 칼 같이 빼버리세요."

"14년 전 우리은행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딱 하나였거든요. 기술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냥 너무 귀찮다', '쟤네 진짜 안 지친다', '상대하기 싫다' 뭐 이런 느낌. 지금 하나은행도 아마 상대 팀이 보면 그럴 것 같아요. 트랜지션이 빠르고, 몸싸움을 계속 거니까 아마 귀찮을 거예요. 그런 부분에서 사키랑 (정)예림이 역할이 정말 커요. 소희가 보이는 곳에서 화려하게 빛난다면, 사키랑 예림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빛을 내주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인내와 철학이 결실을 맺은 순간은 지난 14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찾아왔다. BNK를 상대로 63-64로 1점 뒤지고 있던 하나은행이 부른 마지막 작전타임. 이상범 감독이 경기 종료 22초를 남기고 작전판을 들었다.

"진안이한테 줬지? 슛이 (만약에) 안 됐어. 그럼 사키가 백도어컷 그리고..."

이상범 감독이 손을 들어 박소희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은 다시 작전판으로 내려가 코너에서 45도로 향하는 상행선을 그린다. 감독은 다시 고개를 들어 다시 박소희를 보며 말했다.

"니가 하라고."

1점차에 팀 파울 상황이었기 때문에 첫번째 옵션은 진안의 슛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옵션은 골밑으로 컷하는 이이지마 사키의 슛. 박소희가 슛을 던지는 경우의 수는 세 번째 옵션. 하지만 이상범 감독이 박소희의 이름을 부른 순간, 박소희는 지난 가을의 눈물을 떠올렸다. 투명인간으로 지내다가 처음으로 이름이 불렸던 그날의 기억. 박소희가 만년 유망주에서 진짜 농구선수가 됐던 바로 그날.

"제가 아픈 기억들이 몇 개 있잖아요." 박소희가 덤덤히 말했다. "일본에서 감독님이 처음 이름을 불러줬을 때도 생각이 나면서, 작년 1월에 신한은행 전 마지막 작전타임도 생각이 났어요. 그때 제가 슛을 못 던져서 경기가 끝이 났는데, 그때는 사실 제 패턴이 아니었거든요. 반대 쪽에서 2대2를 하는 패턴이었는데 얼떨결에 공이 저한테 오는 바람에 그렇게 됐던 건데 너무 후회가 남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상황에서 저한테 역할을 주신 거잖아요? 여기에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던지는 건 세 번째 옵션이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제가 던지고 싶은 마음에 패스를 주고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그만큼 감독님한테 보답하고 싶었어서..."

휘슬이 울리고, 박소희가 베이스라인에서 진안에게 패스를 건넸다. 동시에 이이지마 사키와 교차, 박소희는 쏜살같이 달려가 진안에게 핸드오프로 공을 전달 받았다. 수비가 두 번 스위치되면서 박소희의 매치업은 리그 최고의 수비수 박혜진. 여기에 김소니아까지 헷지에 나서며 4개의 팔이 박소희에게 향했다. 오른발을 고정한 채 왼발을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의 잽스탭으로 타이밍을 맞춘 뒤, 박소희가 슛을 올렸다. 박혜진은 여전히 두 팔을 벌려 컨테스트를 하고 있었고 격발 위치는 3점슛 거리보다 세 발은 떨어져 있는 먼 거리, 샷클락은 무려 10초가 남아있던 상황. 완벽한 배드 샷.

"석 점! 박소희! 본인도 믿을 수 없는! 입을 틀어막게 만드는 박소희의 3점이 터집니다! 66대64! 하나은행!" 

박소희가 포효했다. 장소는 사직체육관. 4개월 전 투명인간이 되어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곳에서.



 



"저라고 그런 거 보면 속 안 터지겠어요?" 이상범 감독이 박소희의 배드 샷에 대해 대답했다. "자신 있게 던지랬더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던지고 오고 난리도 아니에요.(웃음) 그런데 지금까지 공격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 없어요. 왜냐면 그게 본인은 찬스라고 생각해서 쏜 거 잖아요. 그럼 그걸 존중을 해줘야죠."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수비를 먼저 생각하고 시즌을 가자고 약속했으니까. 수비에서도 맨날 지적하고 혼내는데, 공격까지 제가 터치해버리면 선수들이 뛰어놀 공간이 없어져요. 숨 쉬고 놀만한 놀이터를 만들어줘야죠. 공격, 수비 다 제가 포제션마다 혼내고 소리 지르면 선수들은 갈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배드 샷도 그냥 쏘게 두는 거죠."(웃음)

수비만 한다면 배드 샷은 얼마든 쏘게 두겠다는 감독의 철학. 그 놀이터 위에서 배드 샷으로 응답한 박소희. 그리고 박소희의 배드 샷을 만들기 위해 뒤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하는 김정은과 이이지마 사키를 비롯한 모두의 헌신. 'In the Navy'의 가사가 마침내 공허하지 않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하나은행의 1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사진 = 이현수, 최수빈 기자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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